기나긴 겨울 여정의 시작

이제 2022년의 달력도 마지막 한 장을 남기고 있다. 눈이 이미 내린 곳도 있고, 제법 추워진 날씨로

겨울이 시작됨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12월 마지막 한 장의 달력을 보면서 비로소 겨울임을 깨닫게 된다. 

해마다 겨울이 시작되면 생각나는 오래된 한 편의 한국 영화가 있다. 최인호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겨울 나그네>는 너무나 인상 깊게 본 영화였기도 하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쓸쓸함 때문에 오랫동안 기억 속에 자리하며 겨울 회상에 잠기게 한다.

영화 <겨울 나그네>

감성적 연출로 유명했던 곽지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안성기, 이미숙, 강석우, 이혜영이 주연했던 이 영화는 군부독재와 정치적 혼란기로 대변되는 19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에 살았던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애절한 러브 스토리로 나는 아직도 최고의 한국 영화로 이 영화를 주저 없이 손꼽는다. 

지금 다시 보면 간간히 웃음 짓게 하는 촌스러운 대사와 멜로 드라마의 전형적인 신파적인 요소들도 눈에 띄지만, 탄탄한 원작에 배우들의 뛰어난 감성 연기로 그 시대를 살았던 나에게는 잊고 살아가는 그때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아주 특별한 영화이다. 

여기에 더불어 이 영화는 슈베르트라는 뛰어난 감성의 작곡가를 알게 해주었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슈베르트의 동명 가곡집 <겨울 나그네>는 영화를 더욱 쓸쓸하고 애절하게 만들었고, 슈베르트의 절망적 고독이 짙게 베어있는 멜로디가 주인공 민우와 다혜의 운명적 만남과 지고지순한 사랑, 그리고 이별 뒤의 고독과 방황으로 계속해서 오버랩 되면서 감성을 더욱 자극하게 하였다.

슈베르트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름다운 멜로디로 유명한 고독의 작곡가다.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애에서 비극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슈베르트는 32년의 짧은 생애를 가난과 고독을 반복하며 병마와 함께 살아야 했던 비운의 작곡가였다. 슈베르트의 짧았던 삶 또한 너무나 드라마틱했었다. 모차르트의 삶을 영화화한 <아마데우스>나 베토벤의 사랑을 영화로 만든 <불멸의 연인>, 그리고 쇼팽의 삶을 조명한 영화 <블루노트>보다도 훨씬 이전에 이미 슈베르트의 삶을 각색한 뮤지컬 <꽃 피는 계절 (Blossom Time)>이 있었는데, 1921년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하여 총 592회의 공연 기록과 1934년 영화화까지 되는 인기를 얻을 정도로 그의 삶은 한 편의 슬픈 영화와도 같았다.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슈베르트는 못생긴 외모와 작은 키에 대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으며, 항상 말이 없고 깊이 고뇌하는 사람이었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그의 곁에는 많은 친구들과 조력자들이 있었지만, 지극히 내성적 성격을 지녔던 슈베르트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고독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타고난 허약체질과 끊이지 않았던 크고 작은 병들로 그는 죽음을 늘 염두하며 살아야 했지만, 이러한 절망적 고독을 고뇌와 번민을 거듭하며 음악으로 승화시켜 창작에 몰입했다. 

32년의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교향곡, 실내악, 독주곡 등 전 분야에서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가곡의 왕’으로 불릴 만큼 600곡이 넘는 수많은 그의 가곡들을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창작에 몰입했던 작곡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들에는 항상 아름다운 멜로디가 있으며, 곡마다 특별한 멜로디와 선율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이끌면서 심금을 울리게 한다. 피아노 5중주곡 <송어>가 그랬고, <미완성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곡 <죽음과 소녀>, <아베 마리아>,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등의 대표작들도 모두 아름다운 멜로디가 돋보이는 걸작들이다.

서두에 그를 감성의 작곡가로 표현한 것은 그가 시를 사랑했고, 이를 음악으로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낸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1년 전, 마치 죽음을 예감한 듯, 현악 4중주곡 <죽음과 소녀>를 작곡했고, 이어 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완성했다. 빌헬름 뮐러의 시에 음악을 붙인 겨울 나그네의 원제는 <Winterreise>로 영어로는 <Winter Journey>다. 즉 ‘겨울 여행’이나 ‘겨울 나그네 길’로 표기하는 것이 옳은데, 일제시대에 일본어 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잘못 표기하여 겨울 나그네가 되었다. 슈베르트의 대표작인 ‘송어’를 ‘숭어’로 잘못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 나그네> 앨범 커버

그런데 나는 실연한 젊은이의 절망적인 어두움을 말한 뮐러의 시나, 어두운 잿빛으로 뒤덮인 애절한 슈베르트의 음악이나, 이 모든 것이 가슴 아픈 느낌의 여운으로 남아 ‘겨울 나그네’가 이 곡의 제목으로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겨울 나그네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한 탓에 나는 슈베르트를 겨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로 생각한다. 따뜻한 커피 한잔에 슈베르트 가곡을 들으며 차창 밖 너머 하얀 겨울을 바라보는 잠깐의 여유는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 속에는 슈베르트의 고통을 생각하는 고독과 쓸쓸함도 간직하고 있다. 가난과 병마로 인해 늘 고독했던 슈베르트가 남긴 일기장의 한 구절이 항상 내 기억에 맴돌기 때문이다.

“남의 진짜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나는 고독하다. 

– 그러나 이렇게 나의 고통에서 우러나온 작품은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다.”

컬럼 제공: 송정호

블로그 : https://blog.naver.com/jhsong0713

CBM PRESS TORONTO 12월호, 2022

페이스북 : @cbmtoronto

인스타그램 : @cbm_press_toronto_

Copyright© 2014-2022 CBM PRESS TORONT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