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열혈청년 권용인의 세계일주 - 외국인 노동자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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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d Park 댓글 0건 조회 1,193회 작성일 15-07-27 00:18본문
외국인 노동자 다이어리
2011. 8. 24 - 호주도착 첫날 인터뷰를 잡다.
드디어 호주(골드코스트)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가슴이 벅찼다. 본격적인 모험의 시작! '우와~ 백인 겁나 많아! +_+ 우와~ㅁoㅁ 이게 호주의 하늘이구나' 처음 상경한 촌놈처럼 그저 모든 것이 신기했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영어도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었지만 '어찌어찌 되겠지!!!' 하며 그저 나를 믿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입국 심사대에서부터 난항을 겪었다. 긴장해서 간단한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버버버버 거렸다. 친구와 둘이 귀 4개와 입 2개로 서로서로 도와가며 겨우겨우 통과 할 수 있었지만 정말 진땀 뺐다. 처음부터 호된 신고식을 한 셈이다. (호주 도착 2달 만에 혼자가 되었으나, 처음은 동기와 함께 시작했다.)
골드코스트 공항에서 브리즈번으로 이동하여 미리 인터넷으로 알아봐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시내로 나갔다. 제일 싼 휴대폰을 구입하여 개통하고, 은행계좌를 개설하고, 저녁거리를 사서 집에 들어오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 앉았다. 700달러는 진짜 돈도 아닌 듯, 쑥쑥 빠져 나갔다. 친구는 피곤해서 누워 자는데,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암만 물가가 비싸다고 하지만, 이렇게 돈이 금방 줄어들지는 몰랐다. 아무리 첫날이라도 이대로 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섰다. 이력서 꾸러미를 들고 밤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한국과는 달리 밤 10시가 지나니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고, 열려 있는 가게가 몇 없었다. 해외경험이 전무한지라 벌벌벌 떨면서도, 열려있는 가게는 다 들어가서 '암 룩킹 포 더 잡' 을 외치며 이력서를 뿌렸다. 그러다가 한 클럽 앞에서 문지기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사실 못 알아들었지만 대충 눈치로 농담하는 거 같으면 같이 따라 웃어주고 나한테 뭔가 물어보면 '예스' 혹은 '아이 돈 노우' 라고 대답했다.
기회를 봐서 내가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말하니, 자기가 클럽 매니저에게 소개해 줄 테니 내일 인터뷰 해보라고 하였다. 우와아아악!!! (^o^v) 도착 첫날 바로 인터뷰를 잡았다!!! 오자마자 인터뷰를 잡다니!!!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더니 별거 아니네' 하고 생각했다. 10시에 나갔는데, 집에 와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 너무 피곤해서 쓰러지듯 잠들어버렸다.
2011. 8. 25 하늘이 울고, 나도 울었다.
저녁 6시, 친구와 함께 면접을 보러 갔다. 둘이 오라는 소리는 없었지만, 나만 오라고는 안 했다. 둘이 가면 최소 한 명이라도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클럽 앞에서 문지기한테 인사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니, 끈적한 음악소리가 들려오는데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힙합 클럽은 아닌 것 같아 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실망도 잠시!(두둥!) 계단을 모두 지나, 내 앞에 펼쳐진 놀라운 세상! 그 곳은 낙원이었다. 에덴의 동산이었다.
어두컴컴한 실내, 붉은 조명아래 연기가 피어올라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 십 수명의 무희들이 스테이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들은 옷을 벗은 것도 아니고, 입은 것도 아니었다. 내 손바닥 반도 안 되는 천 쪼가리로 아슬아슬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린 여인네들이 한 명씩 순서를 번갈아 무대 가운데의 봉을 잡고 끈적끈적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 '아!!! 이게 외국이구나!? 내가 지금 외국이구나!' 난 그저 감격스러웠다. 이윽고 매니저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정말 여기서 저 섹시한 아가씨들을 위... 아니아니... 세계일주를 위해 꼭 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니저의 말에 집중 또 집중했지만,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공항에서도 그리 고생했는데, 하물며 시끄러운 음악소리까지 겹치는 곳에서 어떻게 알아 듣겠는가? 계속해서 'pardon? sorry? could you repeat 1 more time?'만 외쳐대는 내게 매니저가 말했다. "I can't give you a job"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리얼리? 캔 유 깁 미어 잡???" 매니저가 황당해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I can't give you a job" 나는 감격에 겨워 매니저의 두 손을 꽉 잡고 땡큐를 연발했다. "땡큐 땡큐!!! 땡큐 쏘 머취, 땡큐 vㅔ뤼vㅔ뤼 머취" - (그렇다. 나는 can 과 can't 도 구분하지 못 했던 것이었다.) "No! No job!!! I cannot give you any job. Sorry. " 노(no!!!)와 낫(not)이라는 강한 부정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낙방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거기서) 일하고 싶었는데... 에휴~" 낙심해서 돌아와 잠을 자려는데 어찌 그리 서럽던지 모른다. 그리고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내가 정말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너무 무모했나?', '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한 달도 못 버티고 한국에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돌아갈 돈도 없겠지? 떠나기 전 주위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만류했었던가? 그 모든 사람들이 날 비웃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리뒤척 저리뒤척거리다 담배나 피러 밖으로 나왔다. 돈은 없고, 세계일주 하겠다고 큰 소리 뻥뻥 쳐놓고 왔는데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쪽 팔릴까. 비가 추루룩 내렸다. 처마 밑에 비는 들이치지 않았지만,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래. 나이 27개나 먹은 다 큰 사내놈이, 두렵고 무서워서 펑펑 울었다.
고맙게도 비바람이 거세지길래 건물 구석탱이로 가서 소리내어 서럽게 엉엉 울었다. 한참을 그러다 빗줄기가 그치기에, 혹시나 다른 사람이 보고 있진 않은지 주위를 살폈다. 건물 유리에 비친 나를 보며 억지로 씨익 웃었다. "두고 봐라! 세계일주 성공하고 만다. 두고봐라 두고봐!!!" 그렇게 각오를 되새기며 눈가의 소금기를 씻어내고는 쓰러지듯 잠들었다.
2011. 8. 31 처음으로 쌀밥을 해 먹은 날.
그간 자존심을 버리고, 허영심도 버리고, 조건을 가리지 않고 지원할 수 있는 곳은 가리지 않고 지원했지만, 아무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공장단지로 지역을 옮겨 렌트를 구하고 방세를 선불로 내고나니, 잔고 바닥이 드러났다. 어쩔 수 없이 뭐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한인 사이트에서 단기 창고 일용직 캐쉬잡을 구했다.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뿐더러 시급도 너무 적었다. 창고 일이 끝나면 근처 공장지역을 모두 컨택하곤 했다.
그러다가, 한스(Hans)라는 햄 공장에 인터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인터뷰에 참가하게 되었다. 3~4명을 뽑는데, 지원자가 70명이 넘었다. 벌써 인터뷰만 3번 온 사람도 있었다. 지원자는 많은데, 인터뷰 총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 그러니 에이전시가 인터뷰를 제대로 할 리가 없다. 내 순서가 왔을 때 나한테는 제대로 된 질문도 하지 않고 스윽 지나갔다.
이 느낌 안다. '이건 분명 낙방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싶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른 지원자들은 바로 돌아갔다. 나와 친구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에서 에이전트를 기다렸다. 이윽고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에이전트가 퇴근할 때 차를 가로막아 세웠다. 그가 차 창문을 열고 말했다.
에이전트 : "야, 뭐 하는거야? 비켜. 인터뷰 이미 끝났어. 너 너무 늦게 왔어. 다음 인터뷰 때 와!"
나 : "아니. 나 인터뷰는 벌써 봤어. 할 말 있어서 당신 기다리고 있었어."
에이전트 : "무슨 일이야?"
나는 정말 악마에게 심장이라도 바칠듯한 기세로 내가 할 수 있던 최고 수준의 영어로 말했다.
나 : "나 너무 절박해. 나 군대 다녀왔어. 영어는 잘 못해, 근데 일 정말 잘 할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정말 뭐든지 다 할게! 나는 이 일을 원해. 나는 이 일이 필요해. 니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 올 수 있어. "
에이전트 : "하하하, 알았어. 일단은 지금 급하니 비켜줘"
에이전트 차 뒤로 햄을 운반하는 대형트럭이 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비켜 서고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친구랑 다른 방법을 알아보자며 서로 위로하며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빵빵 경적이 울렸다. 에이전트가 차를 우리 옆에 세웠다.
에이전트 : 근데 너 이름 머야?
나 : 미키!!! 미키!!!! 미키마우스 미키! 얘는 제이크!!! 제이크!!!
에이전트 : 알았어. 연락 할게. 기다려.
똑같은 일을 똑같이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어야 살아남는다. 눈에 띄었다. 내 이름을 일부러 다시 물어갔다.
그날 저녁 우린 처음으로 토스트가 아닌 쌀밥을 먹었다!!!
2011. 9. 5 농장행 결심 - 때로는 머리보다, 느낌만을 믿고 움직이자.
그 일이 있고 정확히 5일 뒤 햄 공장에서 연락이 왔지만, 나와 친구는 비행기를 타고 지역을 이동해 망고 농장으로 가기로 했다. 공장을 선택하면 앞으로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합리적인 생각으로 위험을 줄이려면 공장을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농장생활이 끌렸다. 끊어둔 비행기표가 환불이 안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비행기표 200불 정도는 공장에서 이틀만 일하면 충분히 커버되고도 남는 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농장으로 가야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왔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저 느낌만 믿고 농장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농장을 갔는데 실패하면...? '실패할 거라면, 공장을 가도 실패하겠지.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뭘 해도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가 될 놈 일 것이라 믿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농장으로 떠났다.
2011. 09 ~ 10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농장 생활.
망고 농장은 다윈에서도 1시간 30분 가량 더 북부에 위치한 베리스프링스 근처에 위치했다. 차가 없으면 아무데도 돌아다닐 수 없기에 일주일에 두 번 단체로 슈퍼바이져의 밴을 타고 장을 봐왔다. 한국인들 15명 가량, 프랑스인들 20명 가량이 같이 일을 했는데 외국인들은 대부분 픽킹에 투입되었고, 한국인들은 다 팩킹에 투입되었다.
동양인의 90%이상이 망고 수액에 알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는 컨테이너였고, 시설은 많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시급은 20불이었다. 사람들과 밥도 같이 먹고, 캠핑도 같이 가고, 거의 매일 엠티 간 것 처럼 재밋게 놀았다.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래도 단점이 있었다면, 한국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게 되니 아무래도 영어가 늘지는 않았다. 나는 외국인 친구들과도 친해지고 싶었지만, 이야기 단 한마디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도 최대한 친해지려 노력했다. 밥도 맛보라고 주고, 영상들도 보여주고, 담배도 같이 피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프랑스 애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농장 일은 정말 힘들었다. 30도가 넘는 기온, 망고에 스티커를 붙여서 포장하여 박스를 쌓는 작업은 육체적으로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 87kg이었던 살이 쑥쑥 빠지기 시작했다. 일을 열심히, 빨리 많이 한다고 보스가 돈을 더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을 열심히 해서 할당된 분량을 빨리 채우면, 일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임금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불만이 새어나오며, 천천히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시간에 맞춰 일하자고 담합하게 되었다. 나도 그 담합에 동의했다. 그러나 제일 나이 많았던 '승환' 형님이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자극 받았다.
형님을 따라 그냥 열심히 일했다. 형님이 박스 두개 나르면, 나도 두 개를 날랐다. 형님이 박스를 세개 나르면, 나도 세개를 날랐다. 그저 단순노동일 뿐인데도, 형님과 경쟁하듯이 그리고 때로는 콤비가 되어 주거니 받거니 일 하는게 너무 재미있었다. 열심히 일하니 보스인 이안 할배에게 좋게 보였었나 보다. 농장시즌이 끝날 즈음, 보스할배는 내게 다른 농장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조금 고민했지만, 나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서 시티잡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스의 제안은 거절하고 대신 그에게 레퍼런스를 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후 카지노에서 일자리를 구할 때, 이 레퍼런스가 큰 힘이 되었다.
2011. 10. 29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다만, 준비 된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는게 함정!
농장에서의 생활이 재미는 있었지만 치명적인 단점들이 있었다. 첫째, 차가 없어 이동이 불편했고, 둘째, 농작물 시즌이 끝나면 또 다른 곳을 알아봐야 했고, 셋째, 영어가 늘지 않았다. 부족한 영어실력과 혼자가 된다는 점 때문에 걱정은 많았지만, 농장일만으로는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농장 시즌이 끝날 무렵 나는 인근 도시 다윈에서 시티잡을 구하자고 마음 먹었다.
막막했지만 농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과 잘 지낸 덕분에, 일자리를 잡을 기회는 계속 생겼다. 주위에서 지인들과 일자리를 계속 소개해줬다. 그러나 내 목표는 처음부터 오직 단 한군데! 다윈에서 가장 일하기 좋다는 카지노였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지원하고, 직접 찾아 가고, 농장에서 같이 일했던 스티븐을 통해 인사부 부서장에게 직접 메일도 넣었다. 한편, 부족한 영어실력을 메꾸기 위해 인터뷰 준비도 병행했다. 조급해하지 않으려 했지만 기다림이 계속되자 역시나 초조해졌다. 초조함과 긴장감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인터뷰를 하러 오라고 했다. 카지노였다!!!
인터뷰 당일 보스와 슈퍼바이저가 질문했다. 질문내용은 '왜 지원했냐? 왜 우리가 널 뽑아야 하냐?, 일해 본 경험있냐?, 우리 회사에 대해 뭘 알고 있냐?, 얼마나 일할 수 있냐?' 등등 이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 하지만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다신 없을 기회, 스트립 클럽에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어떤 질문에도 답변할 수 있도록 인터뷰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가지고 간 노트북을 켜고 준비한 내용을 프레젠테이션 했다.
내 영상과 꿈,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거기에 살을 붙여 질문에 답변했다. 끝에 '당신이 줄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꿈을 이룰 기회이다'라는 오글거리는 멘트까지 잊지 않았다. 보스는 이렇게까지 인터뷰를 준비해온 사람은 없었다며 '뷰티풀, 그레이트' 감탄사를 아끼지 않으며 그 자리에서 채용의사를 밝혀왔다. 고작 주방 허드렛일이나 하는 접시닦이 포지션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타국에서 내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느낌에 뿌듯했다.
2011. 11. 1 ~ 2012. 04. 9 성실함에는 반드시 보상이 뒤 따른다
설거지 및 주방청소를 하는 단순 노동직이었지만, 카지노의 근무여건은 상당히 좋았다. 주 40시간, 시급 25불, 뷔페식 식사제공, 유니폼 지급/세탁, 공휴일 더블페이(50불). 연봉으로 환산했을 때 최소 5500만원이 넘는 돈. 호주의 높은 물가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좋은 근무조건이었다. '내가 이런 잡일을 하면서, 이만큼이나 돈을 받아도 되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흡한 영어실력 때문에 처음엔 동료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래도 그저 웃으며 '예스 예스'하며 열심히 일했다. 내 일이 끝나고 나면, 다른 사람을 도왔다. 가끔씩 같은 돈을 받으면서 제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불평 불만하지 않고 열심히 하였다.
그러자, 처음엔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답답해 하던 동료들이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보스는 공휴일 근무가 있을 때마다 항상 나를 근무에 배정해주었고, 동료들도 누군가 일을 못 나오게 되면 나부터 찾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근무시간을 많이 배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무리해서 투잡을 뛰지 않고도, 단기간에 목표보다 많은 여행초기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호주의 농장과 카지노에서 일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 하더라도, 임금에는 큰 차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만큼만 적당히 대충대충 일하는 것을 택한다.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일해도, 똑같은 임금을 받으면 상대적으로 자기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건 잘 못된 생각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듯 해도,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보상은 꼭 돌아온다. 그 보상이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실망할 필요 없다. 보상은 뒤 따른다. 반드시!
[자료출처 권용인]
CBM 자막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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